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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무로에게 한국 근대사 중 영화로 제작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재....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Vaness™ ♡ 2009. 11. 16. 23:50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모든 외교권 일체를 일본에게 빼앗긴다

 

무늬뿐인 황제 고종은 마지막 도박을 건다.

 

헤이그 밀사 파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고종은 3인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결심한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예심판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서기관 이위종

 

 

 

 

 

 

 

 

 

 

 

 

 

 

 

 

 

 

 

 

 

 

 

 

 

 

 

 

 

 

 

고종은 이들에게

 

일본이 우리를 협박해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외교권을 되찾겠다

 

는 내용의 신임장을 건네준다.

 

1907년 4월 22일 이준이 헤이그로 출발한다.

 

 

 

 

 

 

 

 

 

 

 

 

 

 

 

 

 

 

 

 

 

 

 

 

 

 

 

 

 

 

 

이준의 헤이그 까지의 여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준은 일단 러시아 블라디보스크로 건너가 이상설과 합류한다.

 

그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한다.

 

이렇게 상봉한 3인은 시베리아를 횡단해 독일 베를린에 도착하고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두 달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려서

 

마침내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 역에 도착한다.

 

 

 

 

 

 

 

 

 

 

 

 

 

 

 

 

 

 

 

 

 

 

 

 

 

 

 

 

 

 

 

 

 

터무니없이 늦었다.

 

이미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날 개최됐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짐도 풀지 않은 채 회의장에 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관계자에게 한국에서 온 참석자라고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초청장이 없다"는 이유로 차디차게 거절당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고종에게 초청장을 보냈었기 때문이다.

 

밀사 파견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이 손을 써 둔 것이었다.

 

러시아 역시 초청장을 보냈을 때와는 180도 달라진 태도로 이들을 문전박대했다.

 

 

 

 

 

 

 

 

 

 

 

 

 

 

 

 

 

 

 

 

 

 

 

 

 

 

 

 

 

 

 

 

 

허탈감과 절망감 뿐이었던가.

 

두 달이 넘는 여정 속에서 그들을 붙든 건 오직 '주권회복'이었지만

 

그들이 준비해간 수많은 한맺힌 말들을

 

채 토해내기도 전에 그들은 벽에 부딪쳤다.

 

눈물을 머금고 3인의 밀사는 숙소로 돌아온다.

 

호텔 현관에 태극기를 내걸고 다음 날

 

다시 한 번 회의장에 찾아갔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의 빛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만국평화회의보] 편집인

 

윌리엄 스티드가 내밀어 준 손이었다.

 

 

 

회의장에서 절망감에 빠져 주저앉아있던 그들을 주시한 스티드는

 

 자초지종을 물었고 밀사들의 사정을 듣고서 그는

 

[만국평화회의보]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상세히 소개 했고,

 

나아가 한국 대표들을 위해 기자클럽 연설회까지 주선해주었다.

 

사막 속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였다.

 

 

 

 

 

 

 

 

 

 

 

 

 

 

 

 

 

 

 

 

 

 

 

 

밀사 3인은 6월 27일 다시 회의장을 찾아 

 

각국 대표에게 '독립 호소문'을 배포했다.

 

[만국평화회의보]에는 7월 5일자에 이위종과의 인터뷰까지 실린다.

 

 

 

기자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건가?

왜 이런 초라한 몰골로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인가?

 

이위종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며 동방의 먼 나라에서 왔다.

 

스티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위종

우리는 을사조약이 국제법상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요청하고자 한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 상태로 몰아놓고선 우리의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

 

스티드

하지만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위종

그렇다면 이 세상에 정의는 없단 얘기인가. 여기 헤이그에서 조차도..

 

 

 

당시 20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했던 이위종의 인터뷰.

 

아니 그것은 노련함이 아니었다.

 

진실을 넘어선 절박함이었다.

 

고종의 아관파천시 큰 역할을 한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은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천재였다.

 

 

 

 

 

 

 

 

 

 

 

 

 

 

 

 

 

 

 

 

 

 

 

 

 

 

 

 

 

 

 

 

 

이 인터뷰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밀사들은 이어 7월 8일 국제기자클럽에 초청받는다.

 

이위종은 이곳에서 '한국의 호소' 라는 주제로 연설을 한다.

 

소식을 접한 일본의 직접적인 협박에도 이위종은 결코 굴하지 않는다.

 

20살의 앳된 청년 이위종은 1시간 동안 프랑스어로 열변을 토한다.

 

 

 

이 연설에 보여준 각국 대표단 및 기자단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심지어 일본 기자마저 이 연설에 감복해서, 일본정부 입장을 옹호하면서도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 세명에 대해 '진실된 애국의 지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이 어쩌면 바뀔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본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임을..

 

 

 

 

 

 

 

 

 

 

 

 

 

 

 

 

 

 

 

 

 

 

 

 

 

 

 

 

 

 

 

 

 

밀사들에게 큰 힘이 되어준 스티드는 일본의 협박에 굴복한다.

 

그는 돌연 한국 대표단을 비난하고 일본의 입장을 침묵으로 옹호한다.

 

그리고... 7월 14일 이준이 숙소인 드용 호텔에서 숨을 거둔다.

 

이준은 열사가 되었다..

 

 

 

 

 

 

 

 

 

 

 

 

 

 

 

 

 

 

 

 

 

 

 

 

 

 

 

 

 

 

 

 

 

이준의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다.

 

시신 운구를 위해선 일본 영사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일본 영사가 끝내 허가를 해주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이위종과 이상설은 할 수 없이 네덜란드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차디찬 이국에 이준을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그후 60여 년이 지난 1964년에서야 이준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를 들먹이며 고종의 퇴위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헤이그 밀사 계획을 프랑스 대사를 통해 이미 접하고 있던 일본이

 

밀사 파견을 미리 막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고종을 끌어내리기 위해 '구실'이 필요했다.

 

고종은 왕위를 1907년 7월 20일 순종에게 양위한다.

 

이후 일본은 4일 뒤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일본이 한국의 모든 내정을 관리한다.

 

 

 

그후 3년 뒤 경술국치로 518년의 조선은 멸망한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이나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 항일 투쟁 일대기..

    이런 것들이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지 않는 것은 단순한 상업적 경쟁력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시대의 이야기를 영상이라는 컨텐츠로 오락화 시킬만큼 충분한 성찰이 없어서일까요.

 

    일제 시대 항일투쟁의 낭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해석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비록 흥행이나 평단면에서 실패하긴 했지만 <아나키스트>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논란'이 일어날 건덕지를 제공조차 하지 않는 우리의 너무나도 무심한 과거에 대한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1930년대의 경성의 모던보이, 모던걸에 충무로가 군침을 흘리고 있었을 때 가슴 속 한켠이 쓰렸던 이유는

    <색, 계>같은 영화는 꿈도 꿀 수 없는 우리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시크한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출처 : 소울드레서 (SoulDresser)
글쓴이 : ⓘparismatchⓧ 원글보기
메모 : 책속에서만 보아온 헤이그 특사 누가 이 소재로 영화 혹은 드라마를 만들어 줬으면 이 한반도의 역사는 너무나 흥미진진한 것이 많다.